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문학 작품속 ‘서울’ 추억 찾기
국민일보 | 2009-08-17 11:18:52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중략)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이상의 소설 '날개' 마지막 부분이다. 한국 근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연출된 이 '미쓰코시 옥상'은 어디일까. 바로 서울 충무로 1가에 위치한 신세계백화점 본관이다. 이 건물은 일본강점기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코시백화점으로 문을 열었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 어슬렁거렸던 근대 건축물의 상징. 신세계 측이 리모델링을 했지만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앙계단은 문화재적 가치를 살려 그대로 보존했고, 옥상 정원도 재개장해 쓰고 있다.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 저 아래 어지러운 거리를 내려다보면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서울문화재단과 연세대 국문과 BK21 사업단이 함께 만든 이 책은 '서울의 문학지도'를 표방하고 있다. 우리 근현대 문학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전개된 서울 12곳의 산책 코스를 따라가며 작가와 작품 얘기는 물론 상세한 지도, 대중교통 편까지 소개한다. 각 코스는 대개 4㎞ 미만 거리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도록 꾸며졌다.
신세계백화점에서 출발한 소공동·명동 코스를 좀 더 따라가 보자. 신세계백화점 본관 중앙계단이 있는 정문으로 나와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옛 조선은행, 지금의 한국은행이 있다. 이 앞거리를 소설가 구보씨가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배회했다. "어느 틈엔가, 구보는 조선은행 앞에까지 와 있었다. 이제 이대로,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다시 소공동 방향으로 올라가 롯데백화점에 머물면 '꺼삐딴 리' 이인국 박사가 미국행을 추진하며 좋아라 향하던 옛 반도호텔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또 황금정 2정목으로 불렸던 을지로 2가에서는 염상섭의 '삼대' 주인공 조덕기와 김병화가 '놀라 자빠질만한 미인' 홍경애를 만나러 가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윤직원 영감이 춘심이와 함께 명창공연을 보러 가 근천스런 행각을 벌이던 부민관. 그게 현재의 서울시의회 본관임을 알게 되면 이 구식 건물이 새삼 다시 보이지 않을까.
수많은 문학작품이 등장하는 이 책은 그저 읽기만 해도 흥취를 준다. 집을 나서 직접 거닐다 보면 서울 곳곳이 새롭게 보일 수도 있다. 문학이 불어넣은 숨결 덕분에. 그런데 효자동은 왜 이리 많은 문인들이 추억했을까. 그 중 시 두 편을 보자.
'우리들의 옛 동네 효자동에 와서/짜장면을 시켜 놓고 다꾸앙에 춘장을 찍어 먹으며/모서리가 깨어진 가난한 추억을 꺼내 보았다/팅팅 불어터진 짜장면을 쑤시다가/도난당한 추억을 어디에다 신고해야 하나/근처 청와대를 잠시 떠올려 보다가/우리들은 말없이/낡은 중국집을 나왔다'(문정희 '중국집의 추억')
'이제 두번 생각하지 않으리라/효자동을 밤비를 그 기도를/아아 강물 같은 그 많은 눈물이 마른 강바닥/달빛이 어리고/서글픈 편안이/끝없다'(박목월 '효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