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9일 성녀 율리아나 팔코니에리 동정/성 로무알도 아빠스
축일:6월19일 성녀 율리아나 팔코니에리 동정/성 로무알도 아빠스
축일:6월19일
플로렌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자기 집에서 재속 수도자로서 기도와 자선활동을 하며 살았는데,
*성 알렉시오 팔코니에리 축일:2월17일.게시판162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녀 율리아나 동정은 성모의 종이라는 수도원의 일곱 창립자들이 플로렌스에 남자 수도원을 세웠을 때, 같은 목적하에 여자 수도원을 시작한 분이다. 그녀는 1270년 이탈리아의 귀족 팔코니에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때까지 오랫동안 자녀를 얻지 못하던 양친은 기쁨에 넘쳐 하나의 훌륭한 성당을 세워 그리스도교에 봉헌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지금도 율리아나의 묘소로 알려져 있는 성모 영보의 성당인 것이다.
율리아나는 외동딸이었으므로 양친에게 금이야 옥이야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으며 교육도 특별하게 정성을 들여 교회의 정신을 따라 베풀어졌는데, 16세를 맞이하자 양친은 그녀에게 적합한 배필을 맞아 들여 가문을 계승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본래 신심이 두텁고 현세의 재물이나 쾌락을 찾는 마음이 없었던 율리아나는 일생을 예수의 배필로서 봉헌하겠다고 마음을 다해 간청했으므로 양친도 상의한 끝에 드디어 그녀의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동정의 서원을 발해 성모의 종 수도원의 총장인 필립보 베니시오로부터 제3회원으로 입회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후부터 율리아나는 그대로 가정에 있으면서 베니시오에게 지시 받은 규율을 따라 수도 생활에 노력해 왔는데, 130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0년이 지났을 무렵, 같은 의사를 가지게 된 동정녀들과 함께 비로소 공동체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는 언제나 자매들의 말석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원장의 중책을 맡아 어머니로서 모든 수녀들을 돌봐주고 실천함으로써 그들에게 좋은 표양을 주고, 어떤 때는 종과 같이 행동하며 그들을 위해 힘썼다.
또한 율리아나는 성모의 종 수도회와 비슷한 복장을 했으므로 "망토 수녀회(Mantellate)"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의 수도회가 정식으로 승인 받은 것은 120년 후이다.
율리아나는 자선의 행위를 매우 존중하여 규율속에도 이를 첨가했으며 때로는 그 자신이 틈이 없을 때에는 동료 수녀를 보내 플로렌스 시의 병자를 위문했다. 고행에 대해서도 비상한 열심을 드러내 단식재를 지킴에 있어서도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은 전연 음식물을 취하지 않고 토요일에는 음식물을 아주 조금밖에 취하지 않음으로써 철저히 이를 행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는 회칙에 정해진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진해 여러 가지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
이같이 극기 수도하기를 37년, 71세의 노령에 도달한 율리아나는 위염을 앓게 되어 중태에 빠졌는데 토사가 심했으므로 영성체도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뜻이 간절해 사제는 어떻게든 그녀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누워있는 그녀의 가슴에 성체포를 깔고 그 위에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모셔 놓았다.
율리아나는 경건히 그를 조배하고 영적으로 성체의 주 예수와 일치하여 화색을 띠며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1341년 6월 19일의 일이었다. 후에 사람들은 성녀의 유해를 씻으려고 했을 때, 그 가슴에 뚜렷이 성체의 형제가, 거기에 그려져 있는 십자가까지도 명백히 찍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마리아의 종 대 수도원(남자수도회 창설지)
마리아의 종 수도회는 1233년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에서 교회역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일곱명의 성인들에 의해서 설립된 수도회이다
다양한 신분을 살고있던 성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 초대 공동체 처럼 완전히 ’한 마음 한 뜻’으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전 생애를 바쳤다.
마리아의 종 대 수도회는 남자 수도회, 관상 수녀회, 활동 수녀회, 재속회로 구성된 10,000여명의 회원들이 전 세계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같은 영성을 살지만 창설자의 설립 목적의 차이에 있어서 수녀를 구분 짓기 위해 설립지명을 명칭에 연결시킨다. (마리아의 종 수녀회홈에서)
*성모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 축일:2월17일.게시판162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모님. (마리아의 종 수녀회홈에서)
청소년 상담가들은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들이 나서서 벌을 주는 것보다 자연적인 결과로 주어지는 고통을 받아들이게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저녁밥을 먹기 싫어하면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고 벌을 주는 대신 배가 고픈 채 잠들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율리아나는 금욕 생활을 지나치게 한 결과 소화기에 이상이 생겨 어떤 음식도 소화시킬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금식을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자기 몸을 학대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율리아나는 죽을 때까지 잘못된 선택의 자연적인 결과인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때로 하느님은 현명한 부모처럼 우리를 양육하신다. 직접 오셔서 간섭하시기보다는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 빚어진 당연한 결과를 감수하게 하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부모의 마음이 누그러질 때까지 졸라 대는 아이들처럼 그분께 매달리곤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자초한 고통에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보다는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이 더 현명한 태도일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고통을 부당한 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가? 내가 만든 고통 속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축일:6월19일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오스티네 귀족 출신인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또는 로무알도)는 부친의 살인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세 때에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베네치아(Venezia) 교외에 살던 마리누스(Marinus)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인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1월 10일)가 마리누스와 성 로무알두스를 쿡사(Cuxa)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Pereum)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헝가리의 마자르인(Magyars)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 디 카스트로(Val di Castro)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들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것은 후일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자료 로무알도는 '영광과 권세'란 뜻이다. 3년 후에 몇몇 수사들에게서 그는 안정되지 못한 성덕을 추구한다는 깨우침을 받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교황의 허락을 받아 헝가리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 또 어떤 때는 지독한 영적 무미 건조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8절)는 구절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 놀라운 빛과 영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 뒤에 수도원에서 머물던 그는 방탕한 생활 때문에 자기에게서 꾸지람을 들은 어떤 젊은 귀족으로부터 수치스러운 죄명으로 고발을 당했다. 그는 엄격한 참회 행위를 해야 했고 미사를 드리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공동체에서 격리되었다. 그가 세운 수도원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토스카나에 있는 카말돌리(주인의 이름인 Campus Maldoli를 따서)수도원이다. 여기서 그는 수도공동체와 은수 생활을 결합시켜 카말돌리의 베네딕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스도는 훌륭한 지도자로서 우리를 완전한 성덕으로 부르신다. 로무알도가 살고 있던 수도원에 폴란드의 한 공작의 아들이 있었다. 로무알도의 일생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무한하다는 것과 죄인이라 해도 진실로 통회하고 은총이 인도하심에 잘 따른다면 얼마든지 완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좋은 예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음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부모와 같이 무질서한 생활을 했으나 신앙만은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말을 타고 인기척 없는 고요한 곳에 가서 교회에 위반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혹은 성인과 같은 완덕의 생활을 하고 싶다든가 하는 충동을 받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고, 그 기회에 하느님의 은총은 그의 회개를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란 것은 그의 부친 세르키오가 사소한 일로 친척의 한 사람과 불목이 되어 마음 깊이 충격을 받고 라벤나 교회의 클라세 수도원에 가서 40일간 살인죄를 범한 부친과 그리고 그곳에 참석한 자기를 위해 속죄의 고행을 하기 시작했다. 속죄가 끝나 마음이 진정된 후 로무알도는 다시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니 그 날 밤 로무알도는 수사에게 인도되어 교회에 갔다. 다시 자기 무덤으로 사라졌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 그는 겨우 21세였지만 처음부터 모든 일을 정성껏 행하며 특히 기도와 극기를 좋아햇다. 로무알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여러 차례 이를 충고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게 되고 그중에는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까지도 있었다 . 978년경 베네치아의 대통령인 베드로 오르세올로가 세속을 떠나 로무알도도 그 수도원 부근에 초가를 마련하고 종전의엄격한 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농업에도 종사했다. 그 무렵 로무알도는 여러 가지 시련을 당햇다. 아버지에게는 수도원 생활이 너무 엄격했음이지 오래지 않아서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수도원에 머무를 것을 간고히 애원했다. 오래지 않아 선종했다고 한다. 그 후 수년간은 로무알도에 있어서 대단히 복잡한 시대였다. 966년, 독일의 황제 오토 3세는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에 자기의 보호하에 있는 클라세 수도원도 방문하게 되엇는데 그곳의 무질서함을 보고 개혁할 결심으로 이에 적당한 인재를 수도자들에게 선택하라고 한 결과 누구를 막론하고 로무알도를 원했다. 그도 할 수 없이 승낙하고 그곳에 갔으나 그의 허다한 노력에도 허사였다. 그에게 위로가 된 것은 수명의 제자들의 열심한 생활이었다. 보니파시오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로무알도는 그곳으로 급히 가려고 까지 생각했으나 그때 마침 중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 후 로무알도는 어떤 부자에게서 카말돌리라는 한적한 토지를 기부 받아 그곳에 제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고 동시에 카마돌리회를 창설했다. 이수도원은 오늘날까지 계속 그 엄격한 생활양식을 지켜오고 있다. 귀족 출신의 한 청년이 들어왔다. 로무알도도 자기와 같이 남몰래 방탕한 생활을을 하고 있다고, 없는 사실을 들어 나쁜 소문을 퍼뜨렷다. 그는 나이가 많아 임종이 가까운 줄을 알았다. 이튿날 아침 그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제자들이 방에 가서 보니 *수도생활:게시판1822번. *아빠스란?:게시판1751번,94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베드로 다미아노가 쓴 [성 로무알도의 생애]에서 (Cap. 31 et 69: PL 144, 982-983. 1005-1006)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자기를 버렸다. 로무알도는 파렌초시 근처에서 3년간 살았다. 첫해에 수도원을 세우고 아빠스를 두는 공동체를 설립했다. 남은 2년동안 은수 생활을 했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그를 높은 완덕의 경지로 올려 성령의 감도하에 미래에 생길 여러가지 일들을 예견하고 지성의 빛으로써 신구약의 많은 숨은 신비들을 깊히 파고 들어갔다. 그는 자주 하느님을 관상하는 중에 탈혼에 빠져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 대한 표현할 수 없는 불타는 열정으로 여러가지 짧은 기도를 부르짖곤 했다. "사랑하는 예수여, 꿀보다 더 달콤한 주님이시여, 표현할 수 없는 나의 갈망이시여,성인들의 기쁨이시여, 천사들의 즐거움이이여." 성령의 감도를 받아 순수한 기쁨 가운데 그가 부르짖는 애원은 우리 인간의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성인은 어디에 거처하려 할 때마다 자기 방에다 제대와 함께 작은 기도소를 만들고 두문 불출하면서 아무도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여러 은수처에서 거처한 후 이제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발디카스트로에 세웠던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 곳에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아무 두려움 없이 기다리는 동안 작은 기도소가 딸린 방을 따로 만들고서 거기에 들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자 했다. 은수처가 만들어져 그 곳에 들어가 은거하려 할 때, 그는 점점 심해지는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움 당하기 시작하고 병으로 인한 것보다는 연로한 탓으로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모든 기력을 잃고 고통이 더욱 심해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함께 있던 두 형제를 보고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으라고 말한 후 새벽에 아침기도를 바치려 갈 때 다시 들리도록 했다. 형제들은 마지 못해 나가기는 나갔지만 성인의 병세가 걱정이 되어 잠자리로 들지 않고 그들의 스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까 염려하여 몰래 방 가까이에서 지켜 보았다. 얼마동안 거기에 숨어 있은 후 문에다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으나 몸이 움직이는 소리도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성인께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문을 열어 젖히고 급히 뛰어들어갔다. 불을 켰을 때 이미 그의 복된 영혼은 천상으로 이끌려 올라간 채 누워 있는 거룩한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 진주는 이제 위대한 임금님의 궁전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채우고 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