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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세상 위에 군림한 여자, 최승희

나뭇잎숨결 2009. 3. 18. 19:49

춤으로 세상 위에 군림한 여자, 최승희

2008 10/21   위클리경향 796호

나는 춤이다
김선우·실천문학사·2008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자아라고 부르는 그것, 선택, 고투(苦鬪), 우연, 시대가 비벼져서 한 사람의 실존이 빚는 풍경이 출현한다. 그 풍경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삶은 행위함인데, 그 실존적 기투(企投)의 본질은 먹고살기 위해, 혹은 자기실현을 위한 모든 수고를 함축한다. 행위와 수고는 등이 맞붙은 샴쌍둥이다. 수고는 현재를 가로지르는 주체를 익명들로 붕붕거리는 잡음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주체로 나타나게 하며 현재에 닻을 내려 그것을 고정시킨다. 수고는 자아와 세계가 연루되는 사건이다. 사람은 수고를 통해 그 존재를 세계에 등록한다. 그런 맥락에서 행위함은 “정복이자 속박”(레비나스)이며, 현재라는 짐을 짊어지고 시대 속으로 뛰어듦이다. 아니 시대의 인력 속으로 빨려 들어감이다.

시대는 자아의 의지와 관련해서, 때로는 그것과 무관하게 수고를 부과하고 피로를 분출하게 한다. 사람들이 피로를 피처럼 내뿜고 있을 때 도약은 멈춰진다. 피로는 자기 자신과 현재에 대한 멈춤이고 지연됨이다. 삶은 지속이 아니다. 다만 지속처럼 보일 뿐이다. 그것은 무수한 피로들로 인한 멈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수고는 욕망의 현재를 무화시키며 다시 또 다른 현재를 향해 나아간다. 수고함의 결과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그 욕망의 빈곤을 확인하는 일이며, 피로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다. 수고는 피로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육과 정신을 소모하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수고는 피로에서 나오며 피로 위로 다시 곤두박질친다.”(레비나스) 누가 삶을 도약이라고 말하는가 ? 누가 삶을 극복이라고 말하는가? 삶은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피로의 감당이며, 피로함의 본질인 그 경직, 그 마비, 그 오그라듦으로 곤두박질치고 그 곤두박질에서 그것을 넘어감이다. 삶은 피로라는 실존이 앓는 불치병의 흔적을 그 안쪽에 무늬로 새기는 것이다. 피로는 삶에 따르는 부수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피로에서 나와 피로 위로 다시 곤두박질치는 삶을 생각하며 김선우가 쓴 ‘나는 춤이다’를 읽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 춤꾼 최승희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소설 쓰기는 최승희라는 “검은 불꽃, 강력한 죽음의 느낌, 초혼과 위령의 흐느낌”을 느끼게 하는 타자를 인간 보편의 조건 속에서 다시 살기를 하는 것이다. 작가의 자아 안으로 이 타자가 얼마나 녹아들었는지를 보는 것은 곧 이 소설의 밀도를 살피는 일이다.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산야는 어디나 춤과 음악이 가득했다. 나무들은 지칠 줄 모르는 춤쟁이들이었고 구름들이 보여주는 온갖 몸짓은 한나절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라보아도 배고픈 줄 몰랐다. 여자가 모르는 것들이 세상에 가득 차 있었고, 모르는 그 세계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모두 익숙한 리듬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땅속을 제외하고 말이다. 세상은 춤이구나… 몸을 가진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어떤 형태로든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대목은 최승희라는 타자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기를 보여준다. 자아와 타자의 섞임, 서로를 향한 녹아듦이 일어나는 대목인데, 사실은 작가 자신의 세계 바라보기다.

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시대의 인력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간 최승희라는 타자는 곧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내 삶의 가능성으로서 작가의 자아 안에서 충분히 다시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소설의 구성은 그 다시 살기를 위한 장치들일 것이다. 우선 소설은 1인칭과 3인칭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최승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여러 위성이 맴돈다. 최승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며 사진으로 기록하는 기타로, 남편이자 매니저인 안, 중국 경극 제일의 배우 매란방, 이시이와 일본의 무용연구소 동료들이 그 위성이다. 그 위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최승희의 삶이 재구성되고, 또한 그 눈으로 최승희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 관측이 이루어진다.

 


 

작가 김선우


최승희는 강한 여자다. 춤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 위에 군림한다. “내가 이 말을 했던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어. 기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 나는 내가 구할 거야”라고 말할 때 최승희는 세상의 모든 악덕과 맞서 싸울 만큼, 싸워서 자신을 구원할 만큼 강하다. 또 한편으로 최승희는 한없이 약한 여자다. 온갖 악덕과 혼란으로 미쳐 돌아가는 나쁜 시대의 격랑을 이기지 못하고 낙하하는 나비다. “그러나 세계는 아름다움 따위와 상관없이 미쳐가고 있었다.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는 자들의 입에서 저마다 아름다움이 찬양되었다. 노구치 같은 작자도 아름다움을 입에 올렸다.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총칼과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나는 더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무용을 통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게 이 전란 속의 우리에게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일까. 밥도 물도 얇은 옷가지 한 장도 되지 못하는 내 춤이 ? 여자가 스스로에게 물으며 몸서리쳤다.” 시대의 인력이 커지면 춤이나 시와 같은 것들은 그 인력 안으로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 춤과 시가 세계에 대한 도발과 공격을 담고 있더라도 그것들은 덧없이 사라진다. 그때 예술가에게 남겨진 몫은 실존의 열망을 안고 자멸함으로써 세계의 추악과 부당함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일이다.

“따스한 붉은 핏물이 스민 검은 나비가 텅 빈 벽을 날았다. 기타로가 가만히 나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처럼, 잡히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시대가 이 천진무구한 예술가에게 불우한 배역을 맡겼다. 나쁜 시대의 벽을 향해 날아간 검은 나비는 물론 최승희다. ‘나는 춤이다’는 찢긴 날개에 붉은 핏물을 머금은 채 찬연하게 공중으로 도약하며 날아올랐던 한 무희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해방 이후, 북조선의 관리 감독 아래에 놓인 최승희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소설은 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단속적으로 먼 시간과 가까운 시간을 끊고 이어가며 진자운동을 한다. 그 속에서 최승희의 여리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도 여린 모습이 그려진다. 격동하는 시대가 후경이라면 거칠고 도도한 시대의 인력 앞에서 춤추는 무희(舞姬)의 불우한 삶은 그 전경이다. “그러니까,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이 얻어지는 거야. 고치에서 춤을 꺼내듯 이 순간의 몸과 다른 순간의 몸이 그렇게 연결되는 거야.” 몸을 버림으로써 다른 몸을 얻은 이 무희의 불우는 춤으로 충분히 보상된다. 시대가 불가피하게 강요한 수고와 피로들마저 보상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시점과 구성이 잦은 분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장면의 빠른 전환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소설 읽기가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게 빠르게 장면이 바뀌었으니 그것은 미덕이랄 수 있겠다. 그러나 시점과 구성의 잦은 분절들은 소설을 하나의 큰 호흡 속에서 읽는 걸 방해한다. 왜 그렇게 썼을까. 그 비밀을 ‘작가의 말’에서 풀 수 있었다. ‘나는 춤이다’가 있기 이전에 시나리오가 먼저 있었다. 소설은 그 다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문장이 돋보였다. 뜨거운가 하면 차갑고 차가운가 하면 뜨거운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감각적인 깊이를 가졌다. 이 문장이 죽은 최승희를 김선우의 최승희로 생생하게 부활시켰다. 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의 칠 할쯤은 그 문장이 불러일으킨 감흥에서 비롯되었다. 어쨌든 시인 김선우의 첫 장편소설을 축하한다. <장석주>

 

김선우의 또 다른 <물밑에 달이 열릴 때> 는 90년대적 여성시의 문제성을 극복해가는 대표적 여성시인으로 주목을 받아온 김선우의 첫 산문집이다. 시인이 스물아홉을 지나며 세계와 자신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일기처럼 혹은 편지처럼 천천히 기록해오던 산문들을 만날 수 있다(그중 일부는 2000년부터 2001년 사이에『해인』『사회비평』한겨레신문 등에 발표되었다). 이번 산문집에서 우리는 "김선우의 좋은 시들이 어디서 오는지 그 비밀을 조금 들여다보게"(안도현) 된다. 여전히 이 산문에도 김선우 시의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겨지던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빼어난 묘사와 구체적인 이미지의 육화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금세 터져나올 듯한"시인의 "울음"도, "자분자분 숨쉬는 말의 숨결"과 "현실과 몽환 사이의 경계를 드나드는 발소리"도 섞여 있다.

이미지의 구체성이 살아 있는 언어, 정서적인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은 시인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뼈아픈 성찰로 나아간다. 이는 이 글들이 시인이 '책머리에'에 밝히듯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탐구하려고 느릿느릿 풀어낸 "통과제의"의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선우의 산문은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우리 주변에 있는 여리고 귀하고 눈물겨운 것, 하찮고 남루한 것에 대한 애정, 우리 모두의 삶의 버거움과 존재의 슬픔으로 다가간다. 강렬하고 수줍은 듯 관능적인 몸의 표현은 현대문명이 점점 상실해가는 건강한 자연성과 이어지면서 삶의 활기나 존재의 구원과 연결되고 있다.

1부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심문하며 "먼길을 에돌아 문득 시"가 찾아온 기억을 더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질문(「환하세 빛나는 저 겨울 나뭇가지」「죽은 나무를 심다」)을 한다. 시인의 강원도 사랑은 남다르다. 환희에 젖은 아름다운 관능의 바람 속에서 자연을 섬기고 그 섬김의 힘으로 평화를 얻는 울릉도를 이야기하고(「바람에게 길을 묻다」)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 내면서 저물녘 초당 솔숲,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아간다(「위힘한, 아름다운, 하계로 유배온 여자의 노래」)산능선을 어루만지는 달의 숨결과 식물을 키우는 달의 에너지를 그 안으로 열리는 자연스러운 여성성의 활력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귀래에서 달을 보다」) , 따뜻한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찬 그림 5점을 보여준다. 시인이 아끼는 이 그림들은 모두 건강한 여성성의 이미지를 펼치며 독특한 관능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2부는 시인이 "이제야 간신히 나는 나의 운명을 사랑할 줄 알게"되었다고 말한 심정이 잘 스며 있다. 스님이 된 누이에 대한 기억과 부조리한 현실에 맞선 싸움의 기억이 담담하게 고백(「붉은 시편들」) 되며, 생명의 무한한 순환과 우주질서에 대한 깊은 사색에서 나아가 오만한 인간 중심의 문명이 생명에 저지른 파괴를 꼬집는다(「구름의 문에서 무늬를 얻다」「검은 꽃 이야기」). 그런가 하면 "명치끝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광포한 살기"와 분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내면에 존재하는 '연옥'의 풍경을 돌아보게 되는 치열한 자기성찰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육체, 연옥의 문」).

3부는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독서일기 중 13편을 가려뽑은 것이다. 독서일기는 김선우 시인이 무엇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를 일상에서 느낀 단상과 함께 고백한 짧은 글들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맘껏 '오독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고 말한 동방의 현자를 생각하고,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창백한 푸른점』을 읽으면서 일상의 속도 속에서 잃어버린 꿈을 떠올리며 "사랑을 하러 나는 날마다 이 별로 온다"는 속삭임을 듣거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책으로 그르니에의『섬』을 추천하기도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에서부터『유마경』과『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책과 함께한 일상을 섬세하고 정갈한 문체로 담아 시인의 삶의 안쪽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저자 소개

김선우 시인은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창작과비평』1996년 겨울호에「대관령 옛 길」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2000년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 한다면』을 펴냈고 현재 '시힘'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