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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농부와 마흔 살 소, 그리고 목우십도송

나뭇잎숨결 2009. 2. 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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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Old Partner, 2008) 봤어?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인사다.  

사람과 소와의 소통, 인생 절반에 걸친 동반이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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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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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낭소리>,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최노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 최노인과 소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 최노인은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른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다. 여기서 기적이 얼아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없는 말을 전하고 알아 듣는다. 고맙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미물은 모든 생명과 함께 인간의 들러리가 아니라  공생의 존재임을 보여준 <워낭소리>와 마음다스기의  은유인 <목우십도송>의 나오는 <소>는  물론, 그 주제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소>가 우리 삶에 그토록 깊히 발 들여놓은 이면에는 소안에 내지된  格이 人格과 다르지 않다는 통찰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물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 <목우십도송>을 읽어본다.  

 

목우십도송(牧牛十圖頌)   / 보명선사

 

【1. 길들기 전】

 
사나웁게 생긴 뿔에 소리 소리 지르며
산과 들에 달려가니 길이 더욱 멀구나.
한 조각 검정 구름 골 어귀에 비꼈는데
뛰어 가는 저 걸음이 뉘 집 곡식 범하려나.


1.未牧
生獰頭角恣咆哮하니 (분)走溪山路轉遙라
一片黑雲橫谷口하니 誰知步步犯佳苗아.


【2. 길들이기 시작하다】
나에게 고삐 있어 달려들어 코를 뚫고
한 바탕 달아나면 아픈 매를 더하건만
종래로 익힌 습관 제어하기 어려워서
오히려 저 목동이 힘을 다해 이끌더라.


2. 初調
我有芒繩驀鼻穿하니 一廻奔競痛加鞭이라
從來劣性難調制하야 猶得山童盡力牽이라



【3. 길들어 가다】
점점 차차 길이 들어 달릴 마음 쉬어지고
물 건너고 구름 뚫어 걸음 걸음 따라 오나
손에 고삐 굳이 잡아 조금도 늦추쟎고
목동이 종일토록 피곤함을 잊었어라.


3. 受制
漸調漸伏息(분)馳하니 渡水穿雲步步隨라
手把芒繩無少緩하니 牧童從日自忘疲라



【4. 머리를 돌이키다】
날 오래고 공이 깊어 머리 처음 돌이키니
전도하고 미친 기운 점점 많이 골라졌다.
그렇건만 저 목동은 방심할 수 전혀 없어
오히려 고삐 잡아 말뚝에다 매어 두네.


4. 廻首
日久功深始轉頭하니 顚狂心力漸調柔라
山童未肯全相許하야 猶把芒繩且繫留라



【5. 길들다】
푸른 버들 그늘 밑 옛 시내 물가에
놓아 가고 거둬 옴이 자연함을 얻었구나.
날 저물고 구름 끼인 방초의 푸른 길에
목동이 돌아갈 제 이끌 필요 없었더라.


5. 馴伏
綠楊陰下古溪邊에 放去收來得自然이라
日暮碧雲芳草地에 牧童歸去不須牽이라



【6. 걸림 없다】
한데 땅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잠을 자니
채찍질을 아니해도 길이 구애 없을러라.
목동은 일이 없이 청송(靑松)아래 편히 앉아
한 곡조 승평곡에 즐거움이 넘치더라.


6. 無碍
露地安眼意自如하니 不勞鞭策永無拘라
山童穩坐靑松下하야 一曲昇平樂有餘라



【7. 헌거롭다】
버들 언덕 봄 물결 석양이 비쳤는데
담연(淡淵)에 싸인 방초 쫑긋쫑긋 푸르렀다.
배 고프면 뜯어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니
돌 위에 저 목동은 잠이 정히 무르녹네. 


7. 任運
柳岸春波夕照中에 淡烟芳草綠茸茸이라
饑飡渴飮隨時過하니 石上山童睡正濃이라



【8. 서로 잊다】
흰 소 언제든지 백운 중에 들었으니
사람 절로 무심하고 소도 또한 그러하다.
달이 구름 뚫어 가면 구름 자취 희어지니
흰 구름 밝은 달이 서와 동에 임의로다.


8. 相忘
白牛常在白雲中하니 人自無心牛亦同이라
月透白雲雲影白하니 白雲明月任西東이라



【9. 홀로 비치다】
소는 간 곳 없고 목동만이 한가하니
한 조각 외론 구름 저 봉 머리 떠 있도다.
밝은 달 바라보고 손뼉치며 노래하니
그래도 오히려 한 관문이 남아 있네.


9. 獨照
牛兒無處牧童閑하니 一片孤雲碧장間이라
拍手高歌明月下하니 歸來猶有一重關이라



【10. 일원상만 나타나다】
소와 사람 함께 없어 자취가 묘연하니
밝은 달 빛이 차서 만상이 공했더라.
누가 만일 그 가운데 적실한 뜻 묻는다면
들꽃과 꽃다운 풀 절로 총총(叢叢)하다 하리.


10. 雙泯
人牛不見杳無(사)하니 明月光寒萬象空이라
若問其中端的意인댄 野花芳草自叢叢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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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내 이마에 좌우 무인(拇印)을 찍어 놓고
    누가 나로 하여금 수배하게 하였는가.
    천만금 현상으로도 찾지 못할 내 행방을.

    천 개 눈으로도 볼 수 없는 화살이다.
    팔이 무릎까지 닿아도 잡지 못할 화살이다.
    도살장 쇠도끼 먹고 그 화살로 간 도둑이어.



     

    ― 조오현, 〈심우(尋牛)> 중에서


     

    茫茫撥草去追尋 아득한 풀밭 헤쳐 찾아드니
    水闊山遙路更深 물은 넓고 산 멀어 길 또한 깊어라.
    力盡神疲無所覓 힘 다하고 지쳐 찾을 바 없는데
    但聞桐樹晩蟬吟 단풍나무 저문 매미 읊조림만 들리네.


    ― 확암, 〈尋牛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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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십도송 (牧牛十圖頌) 은 중국 명나라 때의 보명화상(普明和尙)이 지은 게송 형식의 선서(禪書)로 열 개의 목우도에 일일이 송(頌)을 붙이어, 길들지못한 검은 소가 차차 길이 잘든 흰소로 변해 가다가 마침내는 일원상이 나타나는 경지까지를 그림과 노래로써 운치있게 엮어 선(禪)수행에 대조하도록 해준 수양서(修養書)이다.  여기에서 소(牛)는 우리의 본래 마음, 본성을 의미하며, 목우는 마음을 찾아 길들이고 닦아간다는 뜻이다.

 

목우십도송의 열가지 순서는

 

① 미목(未牧‥길들기전)

② 초조(初調‥길들기 시작하다)

③ 수제(受制:차츰 길들어가다)

④ 회수(回首:머리를 도리키다)

⑤ 순복(馴伏‥길들었다)

⑥ 무애(無碍‥걸리고 막힘이 없다)

⑦ 임운(任運‥자유롭다)

⑧ 상망(相忘‥주관과 객관이 서로 잊다 )

⑨ 독조(獨照‥홀로 찬란히 비친다)

⑩ 쌍민(雙泯‥일원상만 뚜렷이 나타났다) 등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목우십도송과 비슷한 내용으로 곽암사원(廓庵師遠)선사의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가 있다. 원불교에서는 보명화상의 <목우십도송>을 주로 많이 공부하고 있으나, 불교 선원(禪院)에서는 <십우도>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십우도의 순서는

 

① 심우(尋牛‥소를 찾아간다)

② 견적(見跡‥소의 자취를 발견했다)

③ 견우(見牛‥소의 모양을 보았다)

④ 득우(得牛‥소를 붙잡았다)

⑤ 목우(牧牛‥소를 길들여 간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소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⑦ 망우존인(忘牛存人‥소는 잊어버리고 사람만이 남았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사람도 소도 함께 다 잊어버렸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다시 현실세계로 되돌아 온다)

⑩ 입전수수(入?垂手‥시장바닥 같은 현실 세계속에 들어가 중생제도 하기에 바쁘다) 등으로 되어 있다.

 

 

목우십도송이나 십우도가 다같이 풍류적이면서도 예술과 종교의 깊은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어 수행인의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더욱이 내가 누군가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나를 바꿀 수는 있다. 실은 검은 소와 같은 나를 흰소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래지성을 찾는 것이다. 假我를 버리고 眞我로 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이미지의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참 '나'를 사는 것이다. 참 나를 사랑하며 사는 길은 이기주의와 다르다. 내게 없는 것을 이웃인 당신에게 줄 수는 없다. 기독교의 황금률인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를 사는 길이다. 사랑의 첫 발자욱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제대로 사랑하며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참 '나'를 찾는 길. 마음소 길들이기. 문제는 '나'다. <워낭소리> 나 <목우십도송>, 그 면면에 흐르는 기적은 외부로부터 행운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 그 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