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가타리나 고진 윤리 21

나뭇잎숨결 2009. 2. 2. 08:24

자유와 세계시민, 나와 타자 그리고 책임… 21세기를 살아갈 우리의 윤리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책임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여기 한 명의 육군 병장 A가 있다. 군대에선 모든 병사들이 주특기를 배정받는데, 그는 ‘가만있기’가 주특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슨 일을 해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렇게 쌓여진 잉여시간이 문득 지겨워질 때면 후임병을 괴롭히며 소일을 한다. 그는 말한다. “야 내가 이등병일 때 고참들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휴, 난 완전 천사다. 천사.”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육군 병장 B가 있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을 하며 후임병을 인격적으로 배려해준다. 부대원들 중에는 그가 유니세프에서 파견 나온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이등병일 때 너무 당한 게 많아서, 내 후임들한테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었어.”

동일한 조건에서 도출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결과. 고진의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섣불리 자유의지를 말하지는 않는 대신,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A병장이 악덕고참이 된 원인을 따져보자. 그가 말한 것처럼 군대라는 특수한 조건 그 자체와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한 보상심리를 주요원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B 역시 군대에서 같은 피해를 당했지만 A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 무언가 다른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A와 B가 당한 피해의 수준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 가정환경, 학교생활 그리고 이러한 배경을 잉태한 사회적 구조와 같은 원인들을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은 A라는 개인을 구조의 항목으로 파악하는 ― 고진의 표현대로라면 괄호에 넣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즉 A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는 가정 하에서만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B는 안 그랬는데 A만 그런 걸 보면 A가 더 나쁜 놈이라서 그런 것이라는 식의 접근은 A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언정, 결코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해내지 못한다. 이는 B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B가 그런 선의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B라는 주체를 괄호에 넣고 구조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반면, 책임을 묻는 것은 자유로운 주체를 가두던 ‘괄호’를 벗겨내는 것이다. 책임은 자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자유로운 주체로 설정한다는 것은 행위 당시 시점에서 그가 모든 원인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에 의해 이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진은 이것을 칸트의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책임이란 우리가 자유롭다고 믿을 때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진은 원인과 책임에 관한 논의를 일본의 전쟁책임으로 확대해 나간다. 그는 전쟁의 최고책임자인 천황이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게 된 구조적 원인을 밝히면서 천황제 폐지를 주장한다. 이는 천황 개인의 책임뿐만 아니라, 천황제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며 전쟁책임에 대해 접근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 모든 책임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는 고진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얼마만큼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 상상하고 있을까? 우리는 얼마만큼 구조의 모순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을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밍밍’님은
독서는 결코 실천이 아니며 단지 한 발걸음뿐일지도 모르지만, 그 한 발걸음이나마 온전하게 내딛기 위해 오늘도 책을 읽으며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 http://blog.naver.com/iskrarush
이론적(구조론적) 파악에서 개인은 구조의 항목에 놓일 뿐 주체일 수 없다 - 책 속 밑줄 긋기

병의 원인은 그것이 실제 증세로 나타났을 때에만 소급해서 발견되는 것이고, 일정한 원인이 있다고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39쪽)

그러나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원인은 철저하게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 문제와는 구별해야 한다. (40쪽)

이성적인 교육을 한다 해도 이지메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으로 그럼으로써 이지메는 예전부터 있었던 이지메와는 다른 음습한, 그러나 보다 쾌락적인 것이 된다. (49쪽)

즉, 인식만이 자유를 가져온다는 것, 혹은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만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56쪽)

예컨대 우리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른 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럼 알지 못했다면 책임이 없는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면 책임이 있다. (75쪽)

다시 말해 천황 개인이 아니라 그 구조가 문제고, 그것을 폐지함으로써 천황 개인을 인간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53쪽)

거듭 말하지만 구조론적으로 인식할 때 개인의 책임은 괄호 안에 넣어야만 한다. (…) 그러나 ‘책임’을 물을 경우 그 괄호를 벗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153쪽)

패장은 비록 그 자신이 아무리 최후까지 버텼다 하더라도 여전히 패장이며, 예상외로 적의 포격이 치열했다거나 그 수법의 잔인함, 아군 진영의 배신자 등을 이유로 들어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을 가혹한 요구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전위당의 간판 따위는 내걸지 않는 편이 낫다. (164쪽)

일본의 전방위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교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출생.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영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호세이(法政)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일본 긴키(近畿)대학 교수로 있으며, 미국 예일대 방문교수를 거쳐 1997년부터 컬럼비아대 교수로 강연하고 있다. 1969년에 ‘나츠메 소세키론’으로 군조(郡像)신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78년에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 가메이 가츠이치로(龜井勝一郞)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차이로서의 장소>,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내성과 소행>, <유머로서의 유물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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