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인간은 노마드였다, 이병률의 '끌림'
이병률이 찍은 <중국 백족의 어느 할머니>
신발은 끈을 느슨하게 매야 하리라. 말소리를 낮추어야 하리라. 바람보다 빨라서는 안 되리라. 눈을 감더라도 마음을 감아선 안 되리라. 전생에 혹은 그 전생에 살았던 땅의 냄새를 맡게 되더라도 그 냄새에 흔들려서는 안 되리라. 순간을 포착하되 거리를 두어야 하리라. 그래야 모든 것들은 매혹적이리라. 갖가지 열매들을 대접받고 심장은 사과의 양 볼처럼 두둑해지리라.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르리라.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있을지도 모르리라. 내가 버렸던 전부와 내가 만나야 할 전부가 큰 숲으로 우거져 몇 평 땅을 내주고 쉬라 할지도 모르리라. 그 땅을 가져야 하리라. 그리고 조금 욕심을 내어 조금 더 달라고 말해야 하리라. 씨를 뿌려도 좋으리라. 내 것이 아닌 씨앗을 뿌려, 대접할 것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식탁에 올려도 좋으리라.
- 이병률 산문집 <끌림' #060 그래야 하리라>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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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몰래 뒤를 밟았다.
근데, 매일 혼자서 친구가 그렇게 다니는 길은 나하고 똑 같은 길이었다.
호수에 노니는 물새들에게 눈길을 주고,
내가 앉곤 하던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목공예 기구를 만드는 상점 앞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천막 꽃집 점원이랑 눈인사를 하고 걸었다 멈춰 섰다의 반복.
비록 뒷모습이지만 그 모든 게 똑 같다는 사실에 문득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뭔가 빠진 듯 허전하고 익숙하지 않던 여행에서 가슴 속 독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측은하지만 대견하고, 쓸쓸하지만 듬직한 뒷모습.
나도 저런 뒷모습을 가졌을까. 저건 내 모습이기도 한 걸까.”
- 015 '함께'중
“뭔가를 갖고 싶어한다. 뭔가를 찾아 헤맨다.
뭔가가 더 있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모를 일이다.
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 건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하나씩 쓰러뜨려서라도
그걸 갖고 만지겠다는 건지를.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것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라도 연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something more….
이 세상에 있겠지만 이 세상엔 없을 수도 있는 그것.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자유로울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단 말인가.”
- 031'something more'중
“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떤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티베트 속담이다.
이 속담은 티베트의 칼날 같은 8월의 쨍한 햇빛을 닮아 있다.
살을 파고들 것만 같은 말이다.
내가 지금 걷는 이유는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올 것이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26'내일과 다음 생 가운데'중
청춘의 뜨거운 심장 같은, 사람과 사랑과 삶의 TRAVEL NOTES, 그래 끌림!
이 책은 시인이자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구성작가 이병률이 1994년부터 2005년 올 초까지 약 10년 동안 근 50개국, 200여 도시를 돌며 남긴 순간순간의 숨구멍 같은 기록이다. 모든 여행의 시작이 그러하듯 뚜렷한 목적 없이 계산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주저앉았다 내처 길 위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서른의 목전인 스물아홉에서 마흔의 목전인 서른아홉이 되었다. 아찔한 그 시간.... 동안, 성숙의 이름을 달고 미성숙을 달래야 하는 청년의 목마름을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여행, 여행! 누군가 여행은 영원히 안 돌아오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지만 그에게 여행은 또다시 떠나기 위해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끊을 수 없는 제 생의 뫼비우스 같은 탯줄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운명, 달리 말하자면 이 짓을 이리 할 수밖에 없는 나아가 숙명, 그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그때 내가 본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이 맵다
길 위에서 그는 홀로였으나 외롭지 않았다. 스무 살 되던 해 이미 매혹의 대상으로 타자기와 카메라를 우선 삼았으므로. 그리고 그는 행복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 속에 웃고 있는 제 자신을 사진 속의 어렴풋한 추억으로나마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니까. 또한 그는 고마웠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고아낸 글 속에서 나날이 어른이 되어가는 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또 어딘가로 가기 위해 지도 위에 서성대는 제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은 바로 이 '길', 영혼과 몸의 무한한 그 열림 때문이리라.
끌림은 목차도 없고 페이지도 매겨져 있지 않다. 그냥 스르륵 펼치다가 맘에 드는 장에 멈춰 서서 거기부터가 시작이구나, 읽어도 좋고 난 종착지로부터 출발할 거야, 하는 마음에서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어나가도 좋다. 여행이 바로 그런 거니까. 그러다 발견하게 될 카메라 노트, 짧지만 울림이 깊은, 마음 속 여행지마다 나만 알도록 살짝 꽂아둔 기억의 푯말들!
여행가방에 쏙 들어옴직한 작은 사이즈의 책 크기도 그렇거니와 오돌도돌 책 표지를 장식한 남미 시인의 시 구절을 점자처럼 만져보는 재미, 표지 한 꺼풀을 벗겨 초콜릿으로 발라놓은 듯한 속표지를 만났을 때의 저도 모를 탄성들, 이 책을 읽는 재미임에 분명할 것이다. 또한 이 책에 끌려 정호승 ? 신경숙 ? 이소라 씨가 덧댄 또 다른 '끌림'들은 우리를 제2, 제3의 끌림으로 안내하기에 충분하리라. 그만큼 따스하고 도탑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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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시인에게는 꼭 가보고 싶은, 가지 않으면 아니 될 '마음의 나라'가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만 배낭처럼 걸치고 50여 개국을 정처 없이 떠돌았을까. 장미향이 나는 1온스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1톤의 장미가 필요하다는데, 그는 1온스의 장미향이 간절했던 것일까. 이 책은 여행자의 가슴속에 눈물처럼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순간의 순간만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실은 산문집이라기보다는 시집이며, 바다라기보다는 소금이며, 육체라기보다는 영혼이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 왜 인생이 여행에 비유되는지, 당신의 인생이 어디쯤 어느 곳에서 미소를 띠거나 울음을 삼키며 여행하고 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이 책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 사람이 머물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며, 사람이 여행할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라고.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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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률은 나그네 같다. 늘 어디론가 가고 있다. 놀라운 건 그런 병률이 일상에서는 누구와 견줄 바 없이 지극히 성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길 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을 때가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여행자 병률과 함께 2년쯤 한 동네에 같이 살았다. 그가 빈번하게 카메라를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났으므로 나는 그가 비워두고 간 빈집 식물에 물을 주러 갔다. 두 달 만에 혹은 보름 만에 병률이 돌아와 보여줬던 사진과 들려준 이야기들이 이 책이 되었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곧 떠날 계획을 세웠던 그 마음의 일부도 여기 한데 담겨 있으리라. 나 같은 정주자들에겐 닫힌 문을 밀어볼 때와 같이 설레고 반가운 일이다.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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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을 읽고 그 다음 장을 읽고 다시 아까 봤던 앞장으로 돌아가 내가 읽어낸 게 맞는지 짚어본 다음 조금 전에 읽었던 곳을 또다시 읽는다. 참고서 보듯이 꼼꼼히 읽게 되는 너의 글이 좋다. 나이에 어울리는 주름과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너는 아직도 너무 수줍다. 그 여릿함으로 오랜 시간 가다듬어 보여준 네 마음을 단 한 줄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네 글을 대하는 걸 네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너는 너의 글보다 그렇게까지 예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예민함 때문에라도 그러고 싶다. 책에 글과 함께 실린 네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나였어도 그곳의 그 시간, 그 모습을 담아 왔을 거라 생각하며 참 너무 나 같아서 보다가 웃다가 울었다. 이렇게 나를 닮은 사람을 찾아냈을 때의 뭉클함 때문에도 삶은 살아진다. 좋다. 책도 너도 또 나조차도. (이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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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그는, 태생적이며, 선택적인 노마드, 행복한 유목민에 속한다. 스물 후반에서 서른후반에 접어드는 시간동안 길위의 날들은 그의 낭만이자, 자산이자, 그의 자유정신이다. 살아내야 하는 많은 길 중에서 그는 여행을 선택했다. 무엇을 먼저 살아야 하는지를 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지독하게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랑도 삶도, 여행도 타이밍이 있다. 그가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었고, 그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운이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오늘 그가 하고픈 일을 열일 제쳐놓고 할 수 있는 '오늘'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행복한 노마드인 셈이다. 이병률 시인은 지난 10년간 50개국, 200여 도시를 여행했다.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미국, 모로코, 페루, 인도, 네팔 등 아시아, 유럽 및 북남미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사진과 글로 기록한 순간들을 한 데 모은 산문집이 <끌림>이다. 여행 산문집이지만 여행정보나 여행지에 대한 감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 떠남 ' 자체만이 그의 관심사다. 길 위에서 그의 시선에 포작된 것들을 그는 꼼꼼이 바라보고 음미한다. 여행 가방에 쏙 들어감직한 작은 사이즈의 <꿀림>은 오돌오돌한 책 표지를 장식한 남미 시인의 시 구절을 점자처럼 만져보는 재미와 표지를 한 꺼풀 벗겨내면 초콜릿으로 발라놓은 듯한 속표지 등도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글 속의 목소리와 산문집의 촉감이 잘 어울린다. 당장 배낭을 꾸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