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에피쿠로스의 정원 혹은 아타락시아(Ataraxia)

나뭇잎숨결 2020. 6. 9. 12:21

 

 

 

 

에피쿠로스는 교외에 정원(garden)을 샀는데, 그 정원을 따라 훗날 그의 학교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고도 불렸다. 에피쿠로스는 이 정원에서 메트로도로스, 헤르마르코스 등 그의 가장 중요한 동료들 및 친구들과 기원전 271년에 죽을 때까지 생활하고 연구했다. 정원은 이들 모두에게 있어 학교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삶의 공동체, 정서적 공동체였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플라톤의 학교 아카데미아(Akademia)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교 뤼케이온(Lycheion)과 분명히 달랐다.

 

 

1

 

축북받았으며 불멸하는 본성(신의 본성)은 그 스스로 어떤 고통도 모르며 다른 것들에게 고통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본성은 분노나 호의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나 호의는 단지 약한 것들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3

모든 고통스런 것들의 제거는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육체나 마음의 고통이 없으며 양자 모두의 고통도 없다.

 

4

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며, 쾌락을 능가하는 육체적 고통도 여러날 지속되지 않는다. 반면 고질적인 질병은 육체의 쾌락이 고통을 능가하도록 허용한다.

 

5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는 없다.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서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 수는 없다.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기위한 척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없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快)를 욕구하고 쾌를 최고 선(善)으로 기뻐한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피한다. 동물은 잘못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본성(nature)이 흠 없이 건강하게 판단하는 한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왜 쾌가 추구되고 고통이 회피되는가에 관해서는 증명과 토론을 할 이유가 없다. 그(=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 사실은 지각되는 것이다. 불은 뜨겁고, 눈은 희고, 꿀은 달다는 것이 지각되듯이 말이다. (키케로, 『최고선악론』 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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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가 축복받은 삶의 출발점이자 끝점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는 중요한 그리고 생득적(生得的)인 선(善)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선택행동 및 회피행동은 쾌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쾌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하면서 쾌에로 소급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28-9)

 

 

 

 

그러므로 우리가 쾌락이 주된 선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지하고, 우리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삐딱하게 해석하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방탕한 사람들의 쾌락이나 또는 관능적 즐거움에 속하는 쾌락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고통으로부터의 부재(不在)와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부재를 의미한다. 즐거운 삶을 낳는 것은, 음주와 계속되는 파티, 성적 쾌락, 기름진 식탁에 차린 어류나 맛난 음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거부라는 모든 행위의 원인을 추적하고 오만가지 정신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억견(臆見, 근거없는 판단이나 믿음)을 몰아내는 냉정한 추론이다. (…) 어떠한 쾌락도 본래적으로 악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쾌락들의 작용인은 쾌락에 대한 매우 많은 혼란을 가져온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31-2, 141.)

 

 

그러므로 모든 쾌락은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 선(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쾌락이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든 고통이 악이지만 모든 고통이 반드시 회피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꼭 같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29)

 

 

당신들(=스토아)의 아름답고도 찬란한 덕(德)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이 쾌를 산출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것을 ‘칭송할 만한’ 혹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간주하겠는가? 우리가 의료술을 높이 인정하는 것은 이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건강 때문인 것처럼 (...) ‘삶의 기술’로 간주되어야 할 지혜 및 분별력(prudentia)도, 이로부터 아무것도 산출되지 않는다면, 찾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것을 찾는데, 그 이유는 이것은 쾌를 발견하고 확보하는 ‘전문가’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바로 좋음과 나쁨에 관한 무지 때문에 고달파진다. 이런 결점 때문에 우리는 또 최고의 쾌를 박탈당하며 마음의 극심한 근심으로 고통받게 된다. 분별력이 우리를 쾌락에로 믿음직스럽게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게끔 해야 한다. 분별력으로 인해 두려움과 욕망이 제거되고 헛된 억견들이 추방되도록 해야한다. (키케로, 『최고선악론』 1.42-3]

 

 

루벤스의 세네카의 죽음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자신의 학파를 일구어냈던 저명한 철학자이다. 그는 때로는 비수 같은 언어로, 때로는 따뜻한 설득의 언어로 '쾌락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추적한다. 사람들은 흔히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는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아타락시아(Ataraxia)'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쾌락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쾌락'이라는 말 때문에 숱한 오해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차라리 비쾌락주의의 삶을 설교한 사람으로 이해해야 맞을 듯하다. 에피쿠로스가 ‘쾌락’이야말로 행복의 열쇠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쾌락의 성격이다. 그가 강조한 쾌락은 감각의 탐닉이 아니라 내면의 평정이었다. ‘욕망의 부재’ 상태가 곧 쾌락이었다. 우리가 욕망의 집착에서 떠난다면, 어떤 불행·재난·고통도 행복을 침해하지 못한다. 비유로써 표현하면, 최고의 쾌락은 갈증의 해소가 아니라 더는 목이 마르지 않는 상태다. 다시 말해, 갈증이라는 고통의 부재가 행복이다.

  그의 철학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나란히 간다.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 권력 투쟁 속에서 그리스는 피폐되어갔고, 국가를 지탱하던 중류층도 점차 빈민화되어갔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의 개인주의의 대두와 무관치 않다. 저 자신에만 의존하여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인가? 그러나 그의 철학은 '개인'의 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개인이 관계 속에 있는 개인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쾌락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번잡한 시민의 삶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가 아테네 외곽에 비밀스런 정원을 마련하고 거기에 거주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정원에는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노예·거지·여자들도 동참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garden)은'아타락시아(Ataraxia)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 정원에서 메트로도로스, 헤르마르코스 등 그의 가장 중요한 동료들 및 친구들과 기원전 271년에 죽을 때까지 생활하고 연구했다. 정원은 이들 모두에게 있어 학교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삶의 공동체, 정서적 공동체였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플라톤의 학교 아카데미아(Akademia)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교 뤼케이(Lycheion)과 분명히 달랐다.

 

  에피쿠로스, 그의 철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롭게 떠올려볼 가치가 있다. 국가 질서, 나아가 세계 질서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탐욕스런 이기주의와 경박한 쾌락주의가 휩쓸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성찰로부터 진정한 快, 그 소중한 깨달음과 지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에피쿠로스(Epikouros, 기원전 342~271)가 죽은 뒤 약 600년간 뚜렷한 수정 없이 이어졌다. 제자들을 정원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정원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서로 《자연에 대하여》가 있지만 남아 있지 않아서 다른 철학자들의 저작에 인용된 단편을 통해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제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저작인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가까운 철학자에게 보낸 편지 속에 그의 원자론과 쾌락설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주로 자연학과 윤리학에 대한 생각을 접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자연학에 기초를 둔다.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은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우주의 본성은 물체와 허공”이다. 물체와 허공 외에 무엇도 독립된 실재로 여길 수 없다. “사물이 사멸해서 사라질 수는 없다. 복합 물체가 아닌 것은 분할될 수 없으며, 변하지 않는다. 복합 물체가 아닌 것은 본성상 단단하며,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도 분할될 수 없다. 그러므로 제일 원리는 분할될 수 없는 물체여야 한다.”

 

언뜻 보기에도 데모크리토스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은 복합물체인데, 근본적으로 더 분할될 수 없는 작은 물체들의 결합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만물이 같은 물질적 특성만을 지닌 매우 작은 입자 즉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나눌 수 없는 무수한 원자와 공허한 무한 공간만 실재하고 세계의 모든 움직임은 원자의 운동현상일 뿐이다. 원자는 실체고, 공간은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다. 원자 운동은 정해진 방향이 없고, 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원자가 서로 충돌해 세계가 생성된다. 원자 운동에 정해진 방향이 없다는 것은 이 세계가 우연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원자 운동에 어떤 목적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사고를 부정한다. 자연에서 목적 개념은 전적으로 환상이다.

인간도 원자로 구성된 결합물 즉 물리적 대상일 뿐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원자 운동에서 비롯된다. 삶이란 원자의 집합이 안정된 상태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기간에 해당한다. 죽음이란 복합물을 구성한 원자들이 다시 해체되어 허공으로 돌아가는 상태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으면 원자의 구성체인 신체와 정신은 개별 원자로 분해됨으로써 소멸한다. 사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은 원자론에서 설자리가 없다.

신이 세계를 움직일 여지도 없다. 모든 존재가 원자의 우연한 결합과 분리에 의해 운동하는 상황에서 신의 목적이나 지배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신은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다. 신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신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함으로써 발생하는 두려움의 근거도 사라진다. 신과 사후세계의 부정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대상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에서 벗어난 쾌락 상태를 강조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인생관과 윤리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다.

 

감각과 판단을 통한 인식. 영혼도 원자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영혼은 물체인데, 그 부분은 미세하며, 전체 복합물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그것은 열이 섞인 호흡과 가장 비슷하다.” 영혼은 순전히 물질적 영역에 속한다. 다만 원자의 모양이나 운동이 다를 뿐이다. 영혼을 구성하는 원자는 둥글고 부드러운 모양을 하고 있고, 더 빠르고 활발하게 운동한다.

인식은 일차적으로 사물에서 비롯된다. “천체가 자전하기 때문에 달은 되풀이해서 작아졌다 커졌다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공기의 배열 때문에, 혹은 다른 천체가 끼어들기 때문에 그러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설명에 집착해서 정당한 근거 없이 다른 설명을 배척하지 않는다면, 또한 인간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고려하지 못해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드러나는 사물이 우리에게 이러한 현상을 설명해보라고 청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로 생길 수 있다.

 

사물이 현상을 설명해보라고 청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인식의 출발이 정신이 아닌 사물이다. 그러므로 볼 수 없는 것, 그러한 의미에서 사물이 아닌 것은 인간에게 인식을 자극할 수가 없다.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인식에서 벗어난 무모한 시도다. 개별적 · 구체적 사물에서 인식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연역적 추론만을 타당한 논증으로 간주한 스토아학파와 달리 에피쿠로스학파는 귀납적 접근을 강조한다.

사물을 인식하는 일차적 반응은 정신 작용인 감각에서 비롯된다. “외부 사물의 형태를 ··· 지각하는 것은 그러한 사물로부터 어떤 것이 우리 속으로 들어올 때다.”각주3) 감각될 수 있는 것만 인식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해체된 것에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원자가 해체된 상태이기 때문에 감각대상이 될 수 없다. 감각대상이 아니므로 인식 대상일 수도 없다.

 

영혼과 정신을 원자의 작용으로 이해할 때, 인식은 물질과 물질의 관계가 된다. 인식이란 인간 외부의 원자들이 육체에 충돌해서 일어나는데, 감각적 지각 자체가 원자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감각이 합당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 타당하려면 숙고의 과정이 필요한데, 감각적 인상과 숙고에 의한 판단은 다르다. “판단은 감각적 인상과 대상의 일치”다. 감각을 통해 들어온 인상이 실제의 감각대상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려면 판단이 분명하고 선명해야 한다. 이러한 여과 장치를 통해 감각적 인상과 대상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때 인식이 타당하다고 본다.

 

자유의지 문제에 대하여. 인식이 원자와 원자의 운동으로 성립한다면 인식은 결정론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만약 인식이 결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유의지는 공허한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원자론과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자유의지 사이에 나타나는 간극을 고민한 것 같다. 특히 개인의 행복과 쾌락을 강조한 그들로서는 이론의 완결을 위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정당화시켜야만 했다.

 

현실에서 인간은 나름대로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 헬레니즘 미술의 집대성이라 할 〈라오콘〉은 자유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라오콘〉은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 조각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당시 트로이 제사장이던 라오콘은 그리스 연합군이 남겨놓은 목마의 정체와 신의 계략을 알아차린다. 라오콘이 트로이 사람들에게 목마의 비밀을 경고하자, 그리스 편이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거대한 뱀을 보내 두 아들과 함께 그를 죽인다. 뱀에 칭칭 감겨 몸부림치는 인체의 역동적 동작, 특히 뱀에 물린 라오콘의 경직된 옆구리 근육, 불시에 뱀에 감겨 공포로 가득 찬 표정 묘사가 놀랍기만 하다. 다리의 근육과 핏줄은 금방 터질 듯이 생생하다.

 

라오콘은 신화 속 비운의 주인공인 것만은 아니다. 신의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판단과 행위를 시도한 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실현하려다 죽은 순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유의지는 라오콘만 지닌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적 삶 속에서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한다. 에피쿠로스학파 역시 이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정론 성격이 강한 원자론에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접목시킬 필요를 절감했던 것 같다.

 

에피쿠로스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론 내에서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열어준다. “운동의 시작점을 기본 물체가 일탈을 통해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지상에 있는 생명체에 어떻게 자유의지가 즉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이러한 의지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지 때문에 우리는 쾌락이 모든 사람을 인도하는 곳으로 나아가며, 어떤 고정되지 않은 시점과 장소에서 우리는 운동으로부터 일탈한다. 그런데 언제 어디에서 우리의 마음이 방향을 바꾸었는가? 분명히 모든 사람의 의지가 이러한 운동을 시작하게 하며, 운동이 의지에서 나와 사지로 퍼지기 때문이다.”

 

원자가 허공에서 규칙적으로 운동하다가 가끔 일탈한다. 그 시점과 장소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필연의 법칙을 벗어나는 우연이 작용한다. 일탈이 있기 때문에 필연성의 운명에 도전하는 자유의지도 가능하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모양과 결합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개별 사물을 만든다고 보았다. 루크레티우스는 여기에 원자의 일탈로 개별 사물의 다양성을 보완한다. 원자는 무게가 있기 때문에 운동을 하는데, 기본적으로 원자운동의 궤적과 속도는 법칙이 있지만. 운동이 규칙적이기만 하다면 우연한 현상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경로에서 일탈한 원자들이 충돌해 우연이 생기고 이와 함께 자유의지가 생길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설정했다.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가 일탈 즉 자연의 법칙을 미세하게 벗어날 능력이 있으니 인간의 자유가 성립될 수 있다. 필연적 · 객관적 세계가 가진 법칙과 자유의지를 접목시키려 한 소중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