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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과 그리스도교 영성- 29장. 천하신기(天下神器)와 성도(聖徒)의 길

나뭇잎숨결 2008. 11. 12. 06:22

도덕경과 그리스도교 영성-  29장. 천하신기(天下神器)와 성도(聖徒)의 길

1. 욕취천하(欲取天下)와 종으로서 얻는 도리

<장차 천하를 걸머쥐고 뭔가 해 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치고
그것을 이룬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장차 세상에서 무언가 큰일을 해 보겠다는 의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지가 사사로운 욕심 때문이라면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오히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혹은 세상을 위해 자기 몸을 헌신했던 사람들의 결과는 당대 혹은 후대에 반드시 꽃이 피게 되어 있다. 노자는 인위적인 노력을 가해 강압이나 억지로 천하를 쥐어흔들며 뭔가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유사 이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역사를 되 볼아 보아도 그 말은 타당하다. 비록 노자 시대 훨씬 이후이긴 하지만, 중국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최초로 중국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秦始皇, 기원전259-210)도 그의 강압적이고 무력적 통치의 결과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불과 몇 십 년 밖에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쌓은 만리장성이나, 길이 6백 90미터에 달하는 호화 왕궁 아방궁도 오히려 백성들의 원망만 얻는 것뿐이었다. 어디 그 뿐 이었던가? 억압적 통치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4백 6십 여 명의 선비를 산채로 생매장 하고 진나라 이외의 역사서와 주요 서적들을 불태운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끔직한 폭정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근세사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한 실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나, 이라크의 후세인, 여성을 억압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이끈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아프리카 르완다의 대량학살, 북한의 독재정권 등 이루 다 열거 할 수 없다. 이들 모두가 천하를 쥐고 흔들어 보겠다는 일부 정치가들의 잘못된 야욕으로 말미암는 역사적인 비극의 대표적 사건들이다. 물론 미국이 베트남이나 이라크를 침공한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 모두가 역사의 실패작이다. 천하를 쥐고 흔들어 보겠다는 야심가들을 향해 ‘나는 그 성공 사례를 보지 못했노라(吾見其不得已)’고 노자는 이른다.

천하를 대하는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던가? 예수가 나이 30에 이르러 그의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할 무렵 광야에서 사십일 간의 금식을 마친 후에 마귀의 유혹을 받는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다(마태복음 4:1-11). 첫째는 배가 굶주린 후에 받은 첫 유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는 내용이고,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천사가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한다. 셋째는 마귀가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만국(天下萬國)과 그 영화(榮華)를 보여주며,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이에 예수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다만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할 것’을 말한다.

천하를 얻는 것은 욕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천하는 비우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유자로서 오히려 종의 모습을 지닐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이 역설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알아도 실천 하는 사람이 적다. 영성의 사람은 바로 이점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 이는 바로 죽고자 하는 이는 살리라는 교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2. 천하신기(天下神器)와 무욕(無慾)의 봉사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뭔가를 하겠다고 대 들 수는 없는 것이다. 함부로 대드는 자는 패할 것이요, 휘어잡으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천하는 신묘한 그릇이요,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그릇이나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위적 힘을 가할수록 부작용만 커진다. 가정이나 조직이나 국가도 그렇지만, 자연 환경으로서의 지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태학적 천연의 자연세계를 인간이 함부로 다루면서부터 생태계의 파괴와 오염이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신성한 자연 세계에 함부로 물리적 힘을 가하거나 녹지를 훼손하는 일을 계속할 때, 전 지구적 자연재해와 병폐는 갈수록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위자패지(爲者敗之) 집자실지(執者失之)’ 이 말은 노자의 전체 사상 가운데 인간의 처세 방법을 가장 간명하고 실감나게 요약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승자와 성공자는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누누이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한마디로 ‘무위(無爲)’의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심리적으로 볼 때 너무 잡아 두려고 하다보면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남녀관계가 특히 그러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 같은 '머무는(住)' 마음이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고 상호 관심사가 두터우며 이루어가고자 하는 일과 방향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일치 될 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지만, 이상과 방향이 조금씩 다른데 이를 억지로 합치려 하거나 휘어 잡으려 한다면 어느 틈엔지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두루미가 냇물에 들어가서 먹이를 잡으려고 허둥대는 일은 결코 없다. 가만히 서 있다가 어느 순간 고기를 잡아채거나 아니면 천천히 걸음을 옮기지만 결코 굶주리는 법이 없다.

성서에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아 넘겼다. 그러나 그는 돈도 잃고 예수도 잃었다. 오히려 구약시대의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해 즐거워했다(하박국 3:17-18).’ 다니엘 선지자 또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기원전 585년경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 왕족 가문의 청년 다니엘은 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뜨거운 풀무에 던져진다 해도 하나님이 건져내시리라고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3:18)’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보이고 있다. 자기 신념에 충실한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지 않기에 집착하는 일도 없다. 그야말로 앞서 보았던 대로 ‘위이불시(爲而不侍)’ 즉 봉사를 하되 거기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위의 삶이요 영성이다.

3. 팔물(八物)과 성인의 중도(中道)

<그러므로 세상만물은 혹 앞서 가기도하고 뒤따라가기도 하며, 흐느끼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며, 혹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실려가기도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정도에 지나치거나 사치하거나 거만하지 않는다.>

故物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載或隳.
是以聖人去甚去奢去泰.


불교에서 팔불중도(八不中道)라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가르주나(龍樹)의 사상을 대표하는 중관파(中觀派)의 사상으로서, 생멸(不生不滅), 단상(不斷不常), 일이(不一不異), 거래(不去不來)라는 여덟 가지의 대립적인 견해를 떠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양 극단의 대립을 떠난 중도의 입장을 견지하라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며, 일시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하나인 것도 다른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라 모두가 연기적 생성과 소멸을 거듭 할 뿐이므로 본질상 공(空)만이 참이 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공을 일러 불교에서는 논리적으로 중도라 부른다. 불교의 교학적인 입장에 따라 법상(法相)-유식(唯識) 계열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화엄종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삼고 있을 따름인데, 그 근본 취지는 연기(緣起)적 실상(實相)을 바로보고 편견과 아집(我執)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만물(物)의 행동방식은 본문에서는 여덟 가지(八物)로 설명되고 있지만 그것이 비단 여덟 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님은 말 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세상만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애통하며 흐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칭찬하며 웃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한 사람이 있고, 수레에 실려 가거나 가다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시험에 합격하거나 떨어지는 경우와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모든 것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세상일치고 어느 것 하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있던가? 그러므로 사물 사건을 그저 편견과 극단적인 치우침 없이 중도적 입장에서 여실(如實)히 잘 관찰하고 판단하며 행동 할 일이다. 그래서 성인은 지나치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으며 거만하지도 않다고 했다.

예수의 삶은 바로 중도적 삶이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했던 것이다. 아가페 사랑이라는 대전제하에 율법의 걸림돌을 넘어서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 했고,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는 군중을 향하여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함으로써 여인도 살리고 율법도 완성할 수 있었다. 예수는 또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함으로써, 종의 도리를 수행하여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예수의 역설이요 중도의 삶이었다. 그러한 정신 때문에 그는 당시의 천민구역으로 여기던 이방의 도시 사마리아를 찾아 갔고,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깊은 영혼의 교제를 나눈 것이었다. 잃어버린 도시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소외된 영혼을 살리는 길,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천하는 만만치 않은 신묘한 그릇이다. 그러므로 ‘누가 봉사하려거든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의 길이요, 무위(無爲)의 길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는 패할 것이며(爲者敗之) 또한 백번 잃을 것이다(執者實之). 그러나 세상을 하늘이 내려준 그릇(天下神器)이라 생각 한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갈라디아서 1:10)’로서 자신의 ‘지체(肢體)를 의(義)의 종으로 삼아’(로마서 6:19), 위엣 것을 생각하고(골로새서 3:1) 성령을 위해 심는 자(갈라디아서 6:8)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의 삶이요 성인의 길이자 성도(聖徒)의 길이기 때문이다.